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연운 16주 (문단 편집) == 가치 == 우리나라 [[백제]] 강역보다 조금 큰 수준으로, 중국 전토에 비하면 그리 [[크고 아름다운]] 땅덩이는 아니지만, 북방 이민족 국가-중국 사이에 놓인 [[연산 산맥]]의 사이사이에 형성된 도시들이 많아, '''[[만리장성]] 이남의''' 극도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던 곳이다. 중국사에서 만리장성은 근대 이전까지 '''절대 뚫리지 않은''' 난공불락의 방벽이었다. 중원을 지배한 거란, 여진, 몽골 역시 만리장성을 '''돌아서''' 공략했지 '''정면에서 무너뜨린 적은 없었다.''' 그런데, 이 '''연운 16주가 모두 [[만리장성]] 남쪽에 위치했으니 알아서 [[요나라]]에 대문을 열어준 셈.'''[* 훗날 [[청나라]]는 만리장성을 넘기는 넘었으되 공격하여 뚫은 것이 아니라 [[이자성의 난]] 당시 혼란 중에 [[오삼계]]가 [[산해관]]을 열어줘서 들어간 것이다. 만리장성이 정말 무력으로 뚫린 사례로는 [[열하사변]] 당시 [[일본군]]이 유일하고, 이마저도 [[현대전]], 그것도 폭격까지 동원해서야 간신히 뚫을 수 있었다. 항공대의 지원이 없었던 회봉구 전선의 경우 일본군이 역으로 털렸을 정도니 뭐(...).] 연운 16주를 차지하면, 큰 산맥이나 하천 같은 지리적 장애물은 사라지고, 바로 화북 '''[[평야]]'''지대로 진입해 전쟁을 수행할 수 있게 되기 때문. [[한족]] 입장에서 석경당은 [[한간|사실상 이민족의 중원 관광을 이끌어낸 장본인]]이다. --당사자는 [[사타족]]인데-- 게다가 연운 16주는 이미 개발이 수백 년 동안 진행된 도시들로[* 일례로 탁주는 삼국시대부터 이민족을 막는 거점이었으며(※ [[유비]]의 고향이기도 하다), [[수나라]], [[당나라]] 시대에는 [[대운하]]의 북방 종점인 '''물류도시'''로 중시되었다. [[수양제]] 양광이 [[고구려]]와 전쟁하기 위해 물자를 쌓은 곳도 이 탁주였다.] 이곳을 차지하면 수백만 명의 인구와, 농업생산력 및 기타 산업기반을 새로이 확보할 수 있게 된다. [[요나라]]가 이 16주에 [[다퉁|서경]]과 [[베이징|남경]][* 오늘날 [[베이징]]. 다른 화북 지방에 비해 북방민족의 지배를 훨씬 일찍부터 오래 겪어서 그런지 만리장성 이남의 소위 중원 내지(內地)임에도 불구하고 호화(胡化)가 상당히 진전되어 후대 북방 정복왕조인 [[금나라|금]], [[원나라|원]], 나아가 [[청나라|청]]의 수도가 되었다. 그래서 북경을 위시한 [[하북]] 지역은 지명, 식생활, 언어 등에서 북방의 영향을 많이 받아 [[양자강]] 이남은 말할 것도 없고 양자강 이북 ~ 황하 이남(산동, 하남, 안휘, 호북 등)과도 제법 차이가 있다.]을 둘 정도였으니 말은 다한 셈. 그래서 결국 기존의 소규모 농업, 수렵, 목축에 기반했던 [[요나라]]와 [[금나라]]는 이곳을 기반으로 국력을 키워서 중앙집권체제의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. 심지어 이 나비효과는 [[고려]]에도 미쳤는데 고려는 후삼국 통일 후 아직 불안정한 와중에도 여세를 몰아 [[발해]] 유민세력을 흡수하면서 요동을 되찾기 위해 북진을 시도했지만 연운 16주를 획득해 세력을 크게 키운 요나라가 [[정안국]]을 비롯한 발해 잔존세력과 [[여진족]]을 쳐부수며 고려가 [[압록강]]에 다다르기도 전에 급격하게 동진을 하는 바람에 [[평안북도]] 일대의 [[청천강]]을 양국의 국경으로 삼게 된다. 기가막힌 게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것도 936년, 요나라가 연운 16주를 획득한 것도 하필 딱 936년이다. 이후 고려는 [[서희]]의 담판 덕에 [[강동 6주]]까진 획득해서 어찌어찌 압록강을 국경으로 삼게 되긴 하지만 이어진 2, 3차 [[여요전쟁]]에서 요나라는 원래 있던 유목민족의 기병전력에다 연운 16주에서 비롯된 막강한 물량을 쏟아내는 위용을 보여 고려는 북진은커녕 항상 수세에 몰렸으며 이 때문에 고려의 북진은 크게 좌절된다. 당연하지만 연운 16주의 가치를 잘 알고 있던 한족계 중원 왕조 역시 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. 959년 요나라 원정에 나선 [[후주]] [[시영|세종]]이 요나라 군을 격파하고 최남단 막주와 영주, 2개 주를 되찾았고[* 이후 북송은 영주에 하간부(河間府)를 두어 대요전선의 최전방 거점으로 삼았다.] 여세를 몰아 유주(연주) 공략에 나섰으나 병이 깊어져 병사했다. 후주의 뒤를 이은 [[북송]]은 중원을 통일하고 남은 14개 주 수복을 위해 요나라와 수 차례의 전쟁을 벌였지만[* 앞서 설명한 전략적인 이유도 있지만 또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연운 16주에 속한 탁주가 바로 창업군주인 태조 조광윤의 본관이었다. 때문에 연운 16주는 조씨 황실 입장에서도 반드시 수복해야 할 지역이었다.] 별다른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. 그러다 북송이 [[여진족]]의 [[금나라]]와 동맹을 맺어서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14주 중의 연주 5주를 잠시나마 돌려받아 연산부(燕山府)를 설치하기도 했지만 이것도 전적으로 금나라의 군사력에 의지한 것이었기 때문에 얼마 못 가서 다시 [[정강의 변|금나라의 침공]]으로 빼앗긴다. 결국 연운 16주는 ([[한족]]계 중원 국가 기준으로) 400년 뒤 [[주원장]]이 [[원나라]]를 몰아내고 [[명나라]]를 세울 때까지 찾지 못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